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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실린 이야기

이 포스트는 예전에 이글루스에 썼던 글을 재정리한 것입니다. (date of the original post: 2013-07-26)

그간 미루고 미루었던 항생제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한다.

워낙 방대한 이야기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한참 고민했는데, 의약관련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게끔 하겠다는 본연의 취지에 비추어 볼 때 항생제들을 그 메커니즘에 따라 분류한 후 한 종류씩 설명하는 방식 보다는 친숙한 페니실린에서 시작해서 그로부터 파생된 항생제 개발의 역사를 잠시 따라가보는 방식이 낫겠다 싶어, 일단 오늘은 페니실린 이야기.

요렇게 생겼다. 그냥 그렇다고.

페니실린은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 Fleming이라는 스코틀랜드의 한 생물학자가 발견한 천연 항생물질의 이름이다. (아, 이 알렉산더 플레밍이라는 할배 작위가 있으시다. 알렉산더 경이라고 불러드리자.) 알렉산더 경께서 어떻게 이 엄청난 발견을 하게 되었는지는 아주 잘 알려져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지나쳐버렸을 만한 사소한 사건 혹은 우연 혹은 실수로부터 엄청난 발명 혹은 발견이 이루어진 이야기로서 뉴튼의 사과만큼이나 흔히 인용되는 바로 그 이야기 말이다. (그러나 뉴튼의 사과 이야기와는 달리 페니실린을 발견한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다.)

1차대전에 참전했다가 수많은 군인들이 상처감염으로 죽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난 후 플레밍은 항생물질을 찾는 연구를 계속했다. 1928년 여름, 한달 간의 휴가를 보내고 실험실에 돌아와보니 배양하던 세균들 중 일부가 오염되어서 곰팡이가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오염된 배지 중에서도 곰팡이 가까운 곳의 세균들은 죽어버렸고 곰팡이와 먼 곳의 세균들은 멀쩡한 게 아닌가. 곰팡이가 분비하는 어떤 물질이 세균을 죽인 것이라고 판단하고, 많은 종류의 세균들에 이 곰팡이를 감염시켜서 세균이 죽는지를 관찰하는 한편 이 곰팡이가 Penicillium notatum이라는 종임을 알아낸다. 그리하여 모든 종류의 세균에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꽤 다양한 종류의 세균을 죽이는 효능이 있는 이 물질에 페니실린Penicillin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사실 플레밍 할배 덕분에 페니실린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맞지만 이 물질이 실제 약으로 쓰여져서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까지에는 플레밍 외에 다른 많은 학자들의 노력이 필요했다. 플레밍 본인은 이 곰팡이가 워낙 배양하기 어렵고 또 배양한다 하더라도 거기서 페니실린을 정제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만큼 약으로서의 가치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페니실린을 정제하고 그 구조를 밝히고 대량생산해서 약으로서의 가치가 있도록 만든 것은 하워드 플로리Howard Florey와 에른스트 체인Ernst Chain 등등이다. (나중에 페니실린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플레밍, 플로리, 체인 이 세 사람이 공동으로 노벨상을 수상했음.)

누구나 다 아는 페니실린 발견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는 이쯤하고 그보다는 좀 덜 알려진 페니실린의 작용 메커니즘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모든 항생제의 목표는 박테리아를 죽이는 것이다. 세포를 죽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약이라는 점에서 항암제와 비슷하지만 박테리아를 죽인다는 점에서 훨씬 그 개념이 단순하다. 항암제의 경우 죽여야할 세포와 죽이지 말아야할 세포를 구별하는 것이 매우 어렵지만 항생제는 그렇지 않다. 박테리아랑 인간 세포는 엄청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 차이점을 이용해서 인간 세포는 건드리지 않으면서 세균만 공격하는 것이 모든 항생제에 공통된 작용 원리의 핵심이라 하겠다. 

페니실린은 박테리아의 세포벽을 부수는데, 인간 세포에는 이 세포벽이라는 구조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아무 영향이 없지만 박테리아는 세포벽이 부서지면 살아남을 수 없다. (삼투압에 의해 빵터지게 됨) 이처럼 박테리아만을 선택적으로 죽인다고 해서 항생제를 가리켜 마법의 탄환magic bullet이라고도 한다. 

박테리아는 안쪽의 세포막 말고도 바깥쪽의 단단한 세포벽에 의해 보호받는다. 
이 세포벽은 펩티도글리칸이라고 하는데 아미노산 등등이 그물처럼 얽혀있는 구조이다.

페니실린이 어떻게 박테리아의 세포벽을 부수는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세포벽은 펩티도글리칸이라는 그물망같은 구조물인데 박테리아가 자라거나 분열을 하려면 이 구조물을 부수고 다시 붙이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해야한다. 이때 트랜스펩티다아제라는 효소가 각 조각들을 이어붙이는 역할을 한다. 페니실린은 이 효소를 망가뜨려버린다. 그러면 세포벽은 한 번 부순 다음에 다시 붙일 수가 없게 되므로 결국 박테리아가 죽게 되는 것이다. 

뭐 이런 식으로 조각들을 조립하는 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든 종류의 박테리아에 먹혀드는 건 아니다. 박테리아는 크게 그람양성균과 그람음성균으로 나뉘는데, 그람이라는 특정한 염색기법에 의해 염색이 되느냐 안되느냐에 따라 이런 식으로 이름을 붙였지만 알고보면 그 차이는 세포벽의 구조에 기인한다. 그람음성균은 위에서 설명한 세포벽 외에 그 바깥쪽에 또 한 겹의 외막이 있어서, 페니실린같은 물질이 잘 통과할 수 없도록 한다. 염색도 그래서 안되는 거고.

왼쪽이 그람양성균. 페니실린이 잘 듣는다. 오른쪽이 그람음성균. 페니실린이 먹히지 않는다.

그람음성균한테 페니실린이 잘 먹혀들지 않는 이유는 또 있다. 웬만한 그람음성균은 페니실린을 부수는 효소를 만들어낸다. 이 효소를 베타-락타마아제라고 한다. 페니실린 구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사각링 부분을 부숴버려서 못쓰게 만들어버린다. 

빨갛게 표시한 부분이 바로 베타-락탐beta-lactam이라는 구조이다. 
베타-락타마아제라는 효소가 이 구조를 분해시킨다.
눈치 빠른 분들은 알아챘겠지만, 어쩌고저쩌고 ‘아제'(-ase)라고 하면 그 어쩌고저쩌고를 분해시키는 효소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이 베타-락탐이라는 사각링은 굉장히 불안정한 구조여서 (한편으로는 이러한 불안정성이 트랜스펩티다아제를 공격하는 데 큰 힘이 되기도 하지만) 먹는 약으로 만들기가 어렵다. 소화되는 과정에서 분해되지 않고 버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단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은 페니실린의 구조를 조금씩 바꿔가면서 테스트해보기를 반복한 끝에, 기존의 페니실린이 먹혀들지 않던 종류의 박테리아도 죽일 수 있는 물질(암피실린ampicillin 등), 베타-락타마아제로부터 공격을 덜 받는 물질(메티실린methicillin 등), 안정성이 높아서 먹는 약으로 쓸 수 있는 물질(페니실린 V 등) 등등을 찾아냈다. 어쩌고저쩌고 ‘실린'(-cillin)이라는 이름의 약은 다 페니실린에서 유래한 거라고 보면 된다.

페니실린 계열 항생제들. 여기 언급한 것들 외에도 수없이 많다.
파랗게 표시한 부분이 페니실린 구조이다.

방금 언급한 약물들이 페니실린과 형제지간이라면 사촌이랄 수 있는 약물들도 있다. 세팔로스포린 계열 약물들이다. 세팔로스포린 역시 페니실린과 마찬가지로 사각링 구조를 갖고 있어 베타-락탐 계열 약물로 분류된다. 물론 작용 메커니즘도 같다. 그러나 약간의 구조적 차이가 있어서 페니실린과는 다르며, 페니실린에 비해 그람음성균에 대해 효과가 좋고 안정성도 강하다.

세팔로스포린의 구조.
페니실린과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구조이다.

페니실린과 마찬가지로 세팔로스포린도 좀 더 강한 효과, 넓은 작용범위, 높은 안정성 등을 위해 끊임없이 개발되어 수없이 많은 종류의 세팔로스포린 계열 약물들이 만들어졌다. 세팔로스포린들은 보통 ‘세대’로 구분된다. (1세대 세팔로스포린, 2세대 세팔로스포린 등등.) 세대가 높은 걸 쓰는 게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 항생제 내성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종류의 세팔로스포린들. 세팔로스포린에 공통된 구조를 파랗게 표시했다.

항생제 내성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길어지므로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