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포스트는 예전에 이글루스에 썼던 글을 재정리한 것입니다. (date of the original post: 2017-10-06)
이번주에 약간 여유가 생겨서 그간 숙제처럼 미뤄뒀던 생리대 독성 관련 기사를 쭉 찾아 읽어봤다.
여성환경연대의 의뢰로 강원대학교 김만구 교수 팀에서 시판 생리대 10종에 대해서 화학물질 방출 실험을 했는데 발암물질로 알려진 스타이렌 등 유해물질이 검출된 것이 시작이었다. 애초에 SNS에 퍼져나갔던 것과 달리 릴리안 제품 뿐 아니라 모든 제품에서 유해물질이 검출됐다. 이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식약처에서 생리대 전수조사에 착수했고 얼마 전에 1차 전수조사 결과 “안전하다”는 취지의 보도자료가 나왔다. 하지만 가습기 살균제, 살충제 달걀 등을 겪으면서 신뢰를 잃어버린 식약처의 발표는 여성들을 안심시키는데 별로 기여한 것 같지 않고, 의구심을 부추기는 기사가 쏟아졌다. 예를 들면 왜 생리대 안전성을 생식독성이 아니라 간독성 기준치에 근거해서 판단하느냐는 비판이 있었다.
식약처가 발표한 내용이 어디까지 믿을만한지 스스로 판단해보려고 보도자료를 꼼꼼히 읽어봤다. 식약처에서 한 실험은 김만구 교수 팀에서 한 것보다 훨씬 보수적인 방법이었다. 김만구 교수 팀은 생리대를 상자 안에 넣어두고 공기 중으로 방출되는 화학물질 양을 쟀고, 식약처에서는 생리대를 잘라서 속에 든 화학물질을 녹여낸 후 무슨 물질이 얼마나 들었는지를 쟀다. 전자가 실제 사용례에 가까운 환경에서 현실적인 수치를 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면 후자는 위험의 최대치를 측정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이렇게 측정된 수치를 기존에 알려진 독성 기준치에 비교해 보고 위험 수준을 판단하는 일이 남는다. 생리대를 하루에 7.5개씩 한달에 7일 평생 사용한다고 가정하고 검출된 화학물질이 전량 인체에 흡수된다는 최악의 시나리오에서 계산되는 화학물질 노출량을 미국 환경청에서 제공하는 독성 기준치와 비교했다. 미국 환경청에서는 각종 연구결과를 종합해서 독성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알려진 기준치를 화학물질 별로 정리해서 제공하고 있다. xx보다 높으면 간독성이 나타나고 xx보다 높으면 신경독성이 나타난다, 는 식이다. 식약처에서는 알려진 독성 기준치 중에서 가장 낮은 값을 기준으로 삼아 다시 한 번 보수적인 계산을 했다. 여기까지는 어디에서도 문제를 찾을 수 없었다.
비판적인 기사들에서 지적한 사항들을 하나씩 검토해보자면,
1. 왜 생리대 안전성 평가를 간독성 기준치에 근거해 판단하는가
간단히 말하면 데이터가 없어서이다. 모든 화학물질에 대해 모든 종류의 독성을 검사해서 확실한 기준치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x라는 물질은 잘못 들이마시면 어지럼증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신경독성), 얼마나 들이마셔야 이런 효과가 나타나는가? 더 많이 들이마시면 무슨 일이 벌어지나? 어지럼증을 일으키는 수준 이하에서는 정말로 아무런 신경독성이 없나? 신경계 외에 다른 기관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나? 어린아이들에게 발달 장애를 일으키지는 않나? 임산부가 들이마시는 경우 태아에게 문제가 생기지는 않나? 들이마시는 게 아니고 먹었을 경우에는? 피부접촉인 경우에는? 이런 질문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어떤 화학물질의 독성을 완벽하게 파악한다는 것은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미국 환경청에서 제공하는 기준치는 현재까지 존재하는 연구결과들을 그러모아 분석한 최선의 값이지만 생식독성이 깊이 연구된 경우는 별로 없다. 생식독성 기준치가 없다고 해서 판단을 아예 포기하는 것보다는 있는 값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낫다.
2. 왜 10종의 화학물질에 대해서만 조사했나
더 많은 화학물질에 대해서 조사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시급한 사안이라고 판단해서 특히 건강에 해롭다고 잘 알려진 화학물질 10종을 골라 먼저 실험했고 곧바로 보고서를 발표한 것이다. 다른 화학물질에 대해서는 추후 발표하겠다고 일정까지 발표했다.
3. 여성들이 생리대 사용에 따른 각종 이상증세를 겪고 있다는데 안전하다고만 하면 다냐
미국 환경청에서 제공하는 어떤 기준치도 여성들이 호소하는 증상과 관련한 위험성을 평가하는데 적합하다고 보기 어렵다. 생리대 사용에 의한 화학물질은 먹는 것도 들이마시는 것도 아니고 휘발성 물질이 점막을 통해 흡수되는 방식으로 몸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런 위험성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사람한테서 직접 측정하는 것이 제일 확실한 방법이다. 역학조사를 해야 한다. 이 경우 역학조사는 건강한 여성들을 다수 참여시켜서 생리대 사용 및 생리통 등은 물론 생활습관까지를 포함한 많은 데이터를 오랜 시간 모으는 방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단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식약처에서는 이미 역학조사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식약처가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는 얘기냐고? 아니다. 난 이보다 더 잘 설명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식독성 기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한계를 분명히 설명했어야 한다. 왜 연구의 한계를 설명하지 않고 “안전하다”는 결론만 강조해서 말하는가? 상대방을 얕잡아보는 거 아닌가? 이런식으로 전문가들이 대중을 얕잡아보고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 것 너무 싫다. 전문가의 권위와 신뢰를 스스로 깎아먹는 짓이다. 사실 식약처 직원들은 엄청 열심히 일했을 거고 신속하게 쓸만한 결과를 내놓았다. 안전하다는 결론을 못 믿겠다는 기사를 보면서 속상해할 것 같다. 그치만 국가기관이라면 대중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더 치열하게 고민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차 조사랑 역학조사 때는 연구만 철저히 하지 말고 커뮤니케이션도 좀 더 성실하게 해 주면 좋겠다.
이거 공부하느라 어제 오늘 기사 읽고 식약처 보도자료 읽고 미국 환경청 보고서 읽고 그 보고서에서 인용한 다른 보고서 읽고 그런 종류의 보고서를 어떻게 작성하는지에 관한 보고서 읽고 생리대 독성에 관한 논문 검색해서 읽고 그 논문에서 인용한 다른 논문 검색해서 읽고… 하.. 너무 열심히 했어 ㅠㅠ 읽다 읽다 결국에는 지난번 브뤼셀 EU 미팅 때 주워듣고 잊고 있던 Using 21st Century Science to Improve Risk-Related Evaluations 라는 미국 과학 아카데미 보고서(약 200쪽)를 몽땅 출력해서 제본까지 해버렸다. 앞으로 틈틈이 읽을 예정.
* 생리대 독성에 관한 논문을 검색해보고 알게 된 사실: 생리대 안전성에 관해서는 피부 트러블 외에 연구된 바가 없음. 이번에 문제된 VOCs(volatile organic compounds)는 정말로 연구된 바가 전혀 없다. 폐경기 질환도 그렇고, 인류의 절반이 반드시 경험하는 건강 이슈가 이토록 연구되지 않았다는 데 경악하게 된다. 의학에서도 젠더 이슈는 생각보다 훨씬 큰 문제임을 다시 느낀다.